“單一民族說의 是非”. 국사편찬위원회. 1989.10.9.

國史館論叢 第1輯   >   韓民族의 起源과 國家形成의 諸問題(金貞培)  >   I . 韓民族의 起源問題   >   2. 單一民族說의 是非


單一民族說의 是非

우리 나라 民族의 單一民族說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가 나오고 있다. 하나는 문헌에 입각한 자료에 근거하여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결론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 이해의 의도가 어디에 있건간에 사료가 지니는 年代의 한계성으로 인해 왈가왈부할 어떤 의견을 개진할 수가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된다. 예컨대 濊貊韓등이 우리 민족의 先祖로 문헌에 나오고 있으며 그 이후 우리 민족이 동일한 역사의 단계를 밟은 民族임이 분명하므로 이러한 논리에 접하게 되면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임은 너무나 명백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논점에 미흡한 점이 발견되는 것은 年代가 약간만 올라가도 문헌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해지므로 어차피 考古學·人類學의 입장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單一民族說은 體質人類學의 자료를 토대로 立論이 가능해 지는 경우가 나올 수 있다. 두 번째 측면에서 單一民族說을 거론하게 되는 것이 바로 위의 예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오늘의 北韓의 학계가 韓民族의 單一民族說을 주장하는 것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 한 예를 다음의 문구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웃 지역의 고인류학적 류형들과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 조선 옛류형사람의 고유한 특징은 그가 이웃 지역의 어느 한 고인류학적 류형의 지역적 변종인 것이 아니라 우리 조국 강토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시초류형의 하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조선 옛류형사람이 우리 조국 강토에서 형성된 본토기원의 집단으로 된 것은 그가 바로 ≪만달사람≫과 같은 신인에 줄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옛류형사람은 ≪만달사람≫이나 ≪승리산사람≫과 같이 우리 조국 강토에서 인류진화 발전과정을 거친 신인의 피줄을 이어 형성된 조선사람의 직접적인 선조였다. 따라서 조사람은 본토기원의 집단이며 ≪만달사람≫은 조선사람의 시원으로 된다. 013

이 논리에 의하면 우리 나라 민족은 본토기원의 주민이라는 뜻이며 우리 나라의 舊石器文化 유적과 그대로 연결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만달사람이나 승리산사람은 뒤에서 다시 언급을 하겠지만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한 人骨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에 결국 그 인골을 新人으로 보고 이를 우리 민족의 시원으로 간주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이 單一民族이라는 견해가 體質人類學의 자료에 의거해서 나온 것은 그 논의의 타당성을 떠나서 일단 새로운 각도의 접근이라는 사실은 확인을 한 셈이 된다.
우리 나라에서 舊石器 유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1960 년대부터 한동안 활발한 조사연구가 진행되었지만 그 풍부한 유물이 출토됨에도 人骨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민족의 기원이나 형성을 논하게 될 때 體質人類學의 성과가 기대되지만 그 자료가 전무한 형편에 있었으므로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南北에서 舊石器時代의 人骨이 그 수를 더하고 있어 연구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그 주요한 몇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대현동 역포인

1977년 평양시 력포구역 소재지인 대현동의 동굴이 발굴되면서 사람의 머리뼈 화석이 나타났다. 이 동굴은 대체로 세 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층은 62cm의 두께를 가진 대부분이 모래자갈이고 약간의 진흙으로 섞여 있다. 제2층은 약 50cm의 두께로 이루어졌고 대부분이 진흙으로 되어 있으나 2~8cm의 크기를 가진 석회암 조각들이 약 10%가량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 층에서 많은 짐승화석들과 사람의 뼈 화석이 드러났다. 제3층은 순수진흙으로 되어 있으며 약 28cm의 두께를 갖고 잇다. 사람의 머리뼈 화석이 나온 곳이 역포구역이므로 그 이름을 따서 역포사람이라고 014 명명하였다. 이 머리뼈 화석은 분석 결과 7~10살 미만의 어린 아이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유적과 역포사람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견해가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력포사람》의 발견은 우리 나라가 일찍이 사람이 생겨난 곳의 하나임을 말해주는 더 없이 귀중한 자료로 될뿐 아니라 중요하게는 상원 검은모루 시기의 원인의 직접적인 후손이 바로 《력포사람》이며 《력포사람》 후손이 또한 《덕천사람》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민이 이 땅에서 생겨 검은모루 유적을 남긴 원인으로부터 이른 시기의 고인인 《력포사람》과 늦은 시기의 고인인 《덕천사람》으로, 그리고 신인인 《승리산사람》을 거쳐 련면한 인류진화 과정을 밟아왔음을 더욱 뚜렸이 보여주고 있다. 015

역포인을 가장 오래된 고인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이 자료는 보여주고 있다. 대현동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동식물상의 분석, 그리고 역포인의 체질적 특징과 각종 계치가 제시된 것은 앞으로의 비교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다른 논고에서는 역포인이 7~8세 되는 아이라고 016 표현한 곳도 있어 약간의 차이가 나지만 일단 어린 아이의 화석뼈로 보고 있는 점은 동일하다.

2) 덕천인

평양에서 동북으로 75km떨어진 대동강가에 위치한 이 유적은 1973년에 발견되었다. 평안남도 덕천군 승리산 동굴유적에서 나타난 사람의 화석은 중부 갱신세의 동물의 뼈들이 쌓인 아래층에서 드러났다. 이 유적은 시기를 달리하는 3개의 층으로 이루어졌으며 맨 아래층에서 많은 동물의 화석과 함께 인류학적 가치가 있는 사람의 어금니 2개와 어깨뼈 1개가 발견되었다. 2개의 이빨 가운데 하나는 오른쪽 아래턱 첫째 큰 어금니이며 다른 하나는 왼쪽 윗턱의 둘째 큰 어금니이다. 017 이빨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발견된 위치로 보아 이 이빨은 같은 개체의 것이라고 인정이 되지만 닳아진 정도가 서로 달라 이 2개의 이빨을 한 개체의 것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도 있는 것 같다. 보고자들은 이 자료를 토대로 古人 단계의 인류라고 보고 《덕천인》이라고 명명하였다. 018 이 이외에 어깨뼈는 이빨이 발견된 지점으로부터 1.5m 더 들어간 위치에서 나타났다. 발견된 어깨뼈는 오른쪽의 것으로 화석화되어 있었다.

3) 승리산인

승리산 동굴에서는 덕천인이 나온 층위와는 다르게 구석기시대 맨 윗층에서 아래턱뼈가 출토되었다. 아래턱뼈를 낸 윗층은 상부 갱신세 중기~말기로 추정된다. 아래턱뼈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며 아래턱뼈 가지 부분이 대칭적으로 떨어져 나갔을 뿐 다른 부분은 손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빨은 오른쪽에만 남아있는 바 그것도 둘째 작은 어금니의 뒷조각과 첫째 큰 어금니 뿐이다. 이 유골은 35세 정도의 남자의 것으로 인정되며 턱불룩이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019 아울러 보고자는 이 인골이 고인에서 신인으로 이행되는 형태를 갖추고 있음을 논하고 있다.

4) 만달인

이 유적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승호구역 만달리에 있는 석회암 동굴이다. 1979년, 1980년에 발굴되어 사람의 화석과 석기·골기, 그리고 많은 동물 화석 등이 출토되었다. 동굴의 지층은 시기를 달리하는 3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맨 윗층은 신석기시대 층이고 가운데 층은 후기구석기시대 층이며 맨 아래층은 상부 갱신세층이다.
사람뼈는 윗층과 가운데 층에서 출토되었다. 윗층에서는 윗머리뼈와 윗턱뼈, 아래턱뼈 및 갈비뼈가 나왔으나 보존 상태는 나쁜 것으로 알려지고 잇다. 왼쪽 윗턱뼈 조각은 어린 아이의 것으로 거기에는 첫째 큰 어금니와 둘째 큰 어금니가 남아 있다. 아래턱뼈의 조각은 오른쪽 것인데 두 개의 이빨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보다 年代가 높은 사람뼈는 후기구석기 층에서 나온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얼굴 부분이 없는 머리통뼈와 비교적 온전한 아래턱뼈, 부분적으로 깨어진 아래턱뼈, 팔뼈, 넙적다리뼈 각 1개, 골반뼈 2개가 나왔다. 여기 만달인의 유골은 25~30세 되는 남자의 것으로 頭型지수가 72.6인 長頭型으로 020 판명되었다. 이에 대해서 보고자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장두형의 특징은 현대 조선사람과 조선 옛류형사람에서는 보기드문 현상이다. 머리뼈의 징표들은 시대적으로 적지 않게 변화되였다. 그런 징표의 하나가 바로 머리뼈의 생김새이다. 머리뼈의 생김새는 지역에 따라 얼마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 짧아지는 방향으로 시대적인 변천과정을 겪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단두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보통 단두형이나 또는 중두형을 특징으로 하는 지역들에서 보게 되는 오랜 시기의 장두형은 단두화 과정이 얼마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의 특징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원시적인 징표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장두형에 속하는 만달사람의 모습은 조선 옛류형사람들의 고유한 특징이 형성되기 이전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진다. 021

후기구석기시대의 사람뼈로는 흔치 않게 두형지수까지 나온 귀한 자료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5) 용곡인

1980년 상원 용곡동굴에서 30여 점의 인류화석이 출토되었다. 제1동굴에서 30점, 제2동굴에서 1점이 나왔으며 022 머리뼈·이빨·다리뼈 등의 다양한 유물로 향후의 연구가 주목된다. 보고서에서는 人骨에 대한 별다른 해석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6) 상시인

이 유적은 1980년 단양군 매포면 상시리 바위 그늘에서 많은 짐승뼈와 함께 사람의 뼈가 출토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연대는 늦은 중기구석기시대부터 후기구석기시대까지 살았던 바위 그늘로 알려지고 있으며, 사람의 뼈화석으로는 윗머리뼈 조각 3점, 앞팔뼈 1점, 뒤팔뼈 1점이 나왔다. 나이는 20세가 지난 사람의 것으로 보이고 복원해 본 키는 156~165cm로 추정되고 있다. 023

7) 점말인

1978년에 발굴된 이 유적에서는 발등뼈, 손가락뼈가 나왔으나 024 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는 아직 출간되지 않고 있다.

8) 두루봉인

1982년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 두루봉에서 발굴된 사람의 뼈는 거의 원형대로 출토된 바 있어 025 앞으로의 연구 성과에 따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이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나오지 않았다. 두사람의 뼈가 나왔으나 모두 어린 아이의 것으로 보이고 있다.
위에서 거론한 몇 예가 구석기시대에 나타난 사람뼈의 전모라고 하겠다. 보고서에 따라서는 매우 상세한 각 부위의 계측이 나와 있으나 여기에서는 이를 크게 소개하지 않았다. 이것은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재까지의 사람뼈에 관한 계측만으로는 이를 체계화의 전부라고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연구의 축적을 더 기다려 이를 종합하는 것이 오해의 축소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民族의 單一民族說을 舊石器時代에서부터 구하려는 견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논점이 나오게 된다. 일반적으로 北韓 학계에서는 논조의 차이는 다소 있으나 앞에서 일부 인용한 바와 같이 우리 나라 민족은 원인에서 고인으로, 그리고 신인의 단계로 와서 오늘의 우리 민족으로 발달해 왔다는 비교적 철저한 韓半島 기원설을 내놓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우리 민족의 발달과정을 猿人에서부터 古人, 新人의 단계에서 현재까지 이르렀다는 전과정을 민족의 기원이라는 처지에서 어떻게 수용,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민족의 기원문제라 하면서 그 발생자체를 韓半島로 국한시키는 논리가 폭넓은 先史時代나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의 일반론에서 과연 합리적인 논점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 前者의 경우에는 구석기시대 사람의 뼈가 발견되기 이전에도 구석기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을 근거로 해서 민족의 단일성을 주장한 견해가 이미 나온 바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그러한 뜻의 강도가 높았을 뿐 구체적인 자료 제시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사람이 하나의 피줄을 이어온 혈연적으로 단일한 인류학적 류형이며 이 나라,
이 빵에서 기원한 본토기원의 집단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026

우리 나라 민족의 본토기원설을 내 놓고 잇는 이 견해는 구석기시대의 문화 등을 열거하여 신석기시대의 문화로 그 흐름을 연결시키고 다시 청동기 문화로 들어가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더 엄밀히 말한다면 신석기시대부터 민족문제를 논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신석기시대와 그 이후에 창조된 원시문화의 류형과 특성은 종족의 기원문제를 해명하는데 있어서 힘있는 기초자료의 하나로 이용된다. 027
이상과 같이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수천년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발생발전하여 온 우리 나라 원시문화의 단일성과 그 계승성은 그것이 같은 겨레의 종족들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하여 세대와 시대를 줄기차게 이어왔음을 말해준다.
원시문화를 통하여서도 조선사람이 유구하고 단일한 기원의 집단이며 이 나라, 이 땅에서 생겨난 이래 하나의 핏줄을 이어온 본토기원의 슬기로운 인민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028

위의 인용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와 같이 문화의 단계를 일단 동일 민족의 소산으로 간주하고 그 시원을 新石器時代의 사람으로부터 찾고 있다. 여기서 보면 시원이 되는 上限을 신석기시대로 설정하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기원의 上限이 舊石器時代의 住民과 文化로 더 소급, 적용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이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각 유적에서 나온 사람뼈의 주인공을 오늘의 우리 민족과 직결시키면서 一元論의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만달인이나 승리산인을 집접 거론하는 것이 이를 말하고 있다. 만달인의 두형이 長頭型임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것이 오늘의 우리 민족과 직접 연결된다는 주장의 논리에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산견되고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오늘의 우리 민족의 頭型이 短頭型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長頭型인 만달인을 현존하는 민족과 연결시키는 것은 더 많은 자료의 증가를 보고서 논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보고자도 지적한 바와 같이 長頭型의 예는 오늘이나 지난날의 어떤 자료에도 보기 힘든 경우이다. 그러므로 우리하게 민족의 동일성을 강조하게 되면 전후의 사안이 맞지 않는 논리가 나타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하려는 것이 長頭型은 시간이 지나면서 短頭化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논리이다. 만달인의 長頭가 아직은 短頭化가 덜된 상태라는 의미이지만 이것은 상당히 여러 각도에서 논의와 검토가 가해져야 할 문제이다. 新石器時代의 人骨이 그와 유사하게 나와도 해결이 힘든 상태에서, 시대를 뛰어 넘어 하나의 자료에 기대어 單一民族設을 내놓는 것은 더 검토의 여지가 있다. 筆者는 그러한 논리가 나올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할 이유는 없다고 보지만 논의 자체는 충분한 근거 위에서 전개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 다음은 우리 민족의 本土起源說의 타당성 문제이다 單一民族說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本土起源說이 나오고 있는 것은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사람뼈의 출토에 따라 立論이 마련된 것이지만, 민족기원의 입장에서는 해석의 폭이 상당히 좁아졌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는 민족의 선사문화를 논하고 또 민족의 기원을 운위할 때에 민족의 이동설이나 문화의 전파론만이 문제를 풀어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특히 領土와 住民이 확연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흔히 文化圈 설정이 문제 해명에 크게 도움을 주는 경우가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넓게 비교 검토해야만 사실의 규명에 도움이 될 舊石器時代의 자료에 의거하고, 또 頭型지수도 長頭型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本土起源說을 내놓게 되면 자칫 편협하고 성급한 가정 내지는 결론이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를 안게 된다. 설사 각 시기의 문화단계가 구별되는 역사의 발전단계를 거쳤다고 하여도 그것이 바로 구석기시대의 猿人으로부터 現存하는 우리 민족까지 單一民族이라는 결론과는 쉽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民族의 기원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리 나라 민족기원의 상한이 前期舊石器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되는 것으로 믿으면 크게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것은 자칫 종족의 개념으로 올라가기 쉽고 029 실제로 북한의 업적에는 민족과 種族의 구별에 혼선을 빚고 있음이 030 자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도 이미 나타난 바 있다. 적어도 우리가 민족의 기원이라고 할 때는 오늘의 우리 나라 민족이 그 뿌리를 소급할 때까지 그 연대를 올리면서 주민의 구성에서 政治的·文化的 單位가 분명하게 실체를 드러내는 범위의 총체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이라는 어휘속에는 아울러 ‘形成’이라는 최소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게 마련이다. 적어도 單一民族說을 고려할 때에는 주변의 문화권을 충분히 유념한 뒤에 논의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本土起源說을 자신있게 내놓을 때에는 민족주의에 휘말릴 수 있다는 사실을 십분 이해해야 한다.


註 013: 장우진, 앞의 논문(1987) p.5.

註 014: 류병흥, 〈새로 발굴한 대현동 구석기시대유적〉(≪력사과학≫2, 1979) p.43

註 015: 류병흥, 위의 논문 p.45.

註 016: 《조선전사》 1 원시편(1979) p.24.

註 017: 《덕천 승리산 유적 발굴보고》(1978) p.5.

註 018: 위의 책 p.7.

註 019: 위의 책 pp.7~8.

註 020: 〈승호구역 만달리 동굴유적 발굴 보고〉(《평양부근 동굴유적 발굴보고》, 1985) pp.12~13

註 021: 위의 논문 p.56.

註 022: 《룡곡동굴유적》(1986) pp.21~24

註 023: 손보기, 《상시 그늘 옛 살림터》(연세대학교 선사연구실, 1984) pp.61~71.

註 024: 손보기, 〈체질-형질 인류학상으로 본 한국 겨레의 뿌리〉(《韓國史論》14, 국사편찬위원회, 1984) p.51.

註 025: 忠北大學校 博物館에서 발굴하였으며 筆者도 현장을 방문하여 실물을 확인한 바 있다.

註 026: 장우진, 앞의 논문(1977) p.39.

註 027: 위의 논문 p.40.

註 028: 위의 논문 p.44.

註 029: 金廷鶴, 〈文獻 및 考古學的 考察〉 (《韓國史論》14, 국사편찬위원회, 1984) p.1.

註 030: 大村誠, 〈朝鮮古代における國家と民族の形成〉(《朝鮮史硏究會論文集》25, 1988) p.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