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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1874, 옥스퍼드셔에서 출생
  • 1895,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1] 졸업, 제4경기병 연대에 입대
  • 1900, 하원의원에 당선, 1904년 당적을 자유당으로 이적
  • 1906 이후, 자유당 내각의 통상장관․식민장관․해군장관 역임
  • 1915, 1차대전 중 작전실패의 책임을 지고 해군장관 사임
  • 1921, 보수당 복귀
  • 1924, 재무장관, 영국의 파운드貨를 金本位制로 전환
  • 1939, 영국의 獨逸 宣戰布告와 함께 해군장관에 임명
  • 1940, 5월 13일 총리에 취임, 루스벨트, 스탈린과 함께 연합군 지휘
  • 1945, 총선거에 패배, 야당 당수 역할
  • 1951, 재차 총리에 취임
  • 1955, 당수의 자리를 이든[2]에게 승계
  • 1965, 사망

시대적 배경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보어 전쟁[3]을 계기로 차츰 쇠퇴하기 시작

2차 대전 발발로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내고 나치 독일에 대항해 전쟁을 지휘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요구되던 시기


성장 과정

보수당 당수를 지낸 아버지(랜돌프 처칠 경)와 「뉴욕타임스」紙 오너의 딸인 제니 제롬을 어머니로 둔 유복한 가문에서 출생

그러나 질병, 말 더듬, 소심한 성격, 학업성적 열위로 어린 시절부터 열등감, 우울증을 경험

아버지조차 “평범한 사람만 되어도 다행”이라고 여겼으나,[4] 일부러 어려운 길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단점을 개선, 결국 영국 최고의 지도자가 됨

군인과 신문기자의 신분으로 인도, 남아프리카 등 분쟁지역에 목숨을 걸고 참가함으로써 용기를 연마


주요 업적

배짱, 용기, 집념의 리더십으로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


리더십 특성

① 難關 突破로 자신의 性格을 改造

자신의 弱點을 잘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난관을 조성

신체적 허약 → 군 입대 후 체력 훈련 몰두

말 더듬 → 평상시 늘 발음 연습을 했으며 웅변기술을 연마하여 최고의 정치 연설가가 됨

소심한 성격 → 군인 또는 특파원으로서 奧地나 분쟁지역을 찾아가 생사의 위기를 겪으며 담력을 키움

용기와 카리스마를 보유한 최고의 戰時指導者(incomparable war leader)로서 이미지를 구축

불안한 전시상황에서, 국민들은 처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저항을 지속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배짱과 배포를 발휘

공습 때도 쉬지 않고 각지를 시찰하며 승리의 ‘V자 신호’를 보냄

한 번 문 것은 놓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영국의 불도그’이라는 별명을 얻음

② 危機를 機會로 반전, 덩커크 철수(Dunkerque evacuation) 작전

처칠은 1939년 해군장관에 취임한 뒤, 프랑스를 돕기 위해 파병을 강행했으나, 프랑스가 너무 쉽게 무너지자 파병부대 전체가 프랑스 북부에 고립되어 전멸할 위기에 직면

처칠은 의회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파병을 결정한 까닭에, 모든 책임을 지고 사태 수습에 나섬

프랑스 북부에 고립된 영국군 25만 명에 대한 사상 최대의 철수 작전 단행(다이나모 작전)[5]

전 국민적 단결과 獨逸軍의 판단 착오로 철수 작전이 기적적으로 성공

영국 전역에서 징발되거나 자원한 수많은 선박들이 덩커크 해안에 집결. 라디오 방송을 통해 어떠한 종류든지 사람을 실어 나를 배가 필요하다는 해군의 호소가 계속 이어졌음. 애국심에 불타는 영국인들의 호응으로 도버 해협은 온통 영국 해군과 민간 선박들로 뒤덮였으며, 심지어 요트를 몰고 나온 학생들도 있었음

특히 독일 공군의 공습에 대항, 영국 본토에서 출격한 영국 공군의 엄호작전이 성공리에 수행. 독일군은 의외의 일격에 어느 정도 사기가 저하된 반면, 영국 공군은 자신감을 회복, 이러한 심리적 위축이 영국 본토 공방전까지 이어짐

영국군+프랑스군 33만 8천 명의 병력이 무사히 탈출. 전차, 포 등 중장비는 모두 잃었으나 병력을 고스란히 철수시킴으로써, 후일 이 병력이 그대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

敵地에 고립된 군대를 무사귀환시킴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고 상승일로의 독일군 기세를 꺾는 데 성공

5월 13일 수상에 취임한 후, 5월 26일~6월 3일까지 덩커크 철수에 성공하여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

요트까지 바다에 띄우는 전 국민적 항전의지를 결집함으로써 국민적 단합을 공고히 하고 본토항전의 결의를 확인. 철수 직후, 처칠은 “우리는 좌절하지도 패배하지도 않을 것이며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선언

동시에 처칠은 철수성공에 환호하는 국민에게 “전쟁은 철수 작전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일침하며, 다가오는 본토항전을 대비시킴. 성공에 대한 만족감과 낙관론을 경계

③ 意思疏通의 達人, 20세기 최고의 演說家

처칠은 ‘말의 힘’을 중시하여 연설문 완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역사에 남을 명연설을 다수 남김

1901년 첫 의회연설문을 다듬는 데 6주를 투자, 1940년 가장 급박한 시기에도 처칠은 의회연설 준비에 12시간 이상을 소요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되, 국민에게 환상이 아니라 냉엄한 현실을 정확하게 전달. 1940년 5월 13일 총리 취임 연설:

“내가 국민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다.”

1940년 6월 4일 의회연설에서 對獨抗戰을 천명.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섬을 지킬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디오로 이 연설을 청취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영국의 항전의지를 확신하고 參戰을 결정

독일군의 영국 공습을 막아낸 영국 공군에게 바치는 찬사인 “인류역사상 이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힌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는 유명

CBS 뉴스앵커인 에드워드 머로는 “처칠은 강력한 英國의 언어를 동원하여 戰場으로 보냈다.”고 평가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하면서, 위엄 있는 차림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식장에 나타나 “포기하지 마라!”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라는 두 마디만 남기고 다시 모자를 쓰고는 연단을 걸어 내려옴.

※ 처칠의 용어 선택: ‘공공급식센터’ 對 ‘영국 레스토랑’

전시 식량배급을 맡고 있던 식량장관이 ‘공공급식센터’ 설립을 건의하자 처칠은 이렇게 항의했다. “나는 ‘공공급식센터’라는 용어가 채택되지 않기를 바라오. 공산주의와 구빈원을 연상시키는 끔찍한 단어요. 나는 ‘영국 레스토랑’이라고 불렀으면 좋겠소. 모두들 ‘레스토랑’하면 좋은 음식을 연상할 테고, 다른 게 신통치 않다면 이름이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소.”


[1]샌드허스트 陸軍士官學校(Sandhurst Royal Military Academy): 영국 버크셔 주 샌드허스트 소재. 1799년 런던 율리지에 세워진 王立陸軍士官學校와 샌드허스트의 王立軍事大學의 교육과정을 계승. 처칠(Churchil)과 몽고메리(Montogomery) 등이 이곳 출신.

[2]이든(Sir Robert Anthony Eden, 1897∼1977): 영국 정치가. 옥스퍼드대학 재학 중 1차 대전에 종군했고, 2차 대전시 외무장관으로서 영국의 戰時外交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 1954년 제네바회의의 개최에 큰 역할. 1955년 처칠의 뒤를 이어 총리로 취임. 1956년 이집트 정부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직면하여 프랑스, 이스라엘과 협의해서 이집트를 공격했으나, 국내외로부터 강한 비난에 직면, 1957년 1월 사임.

[3]보어 전쟁(1899~1902): 영국이 남아프리카의 보어인이 세운 트란스발공화국을 합병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 남아전쟁(南阿戰爭)이라고도 함. 영국의 침공 목적은 해당지역의 금광 확보였으며, 철저한 전멸전법을 취해 인구 50만 명인 지역에 45만 명의 군인을 투입해 전답, 가옥을 불사르고, 21만 명을 집단 강제수용. 보어인이 결국 영국에 굴복했으나, 국제적 비난여론으로 영국도 해외경영에 독자노선을 걷던 정책(일명 ‘영광의 고립’ 정책)을 포기하는 계기가 됨.

[4]그의 아버지는 처칠의 지능발달이 늦어 군인 이외의 직업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처칠은 장난감 병사의 전쟁놀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함.

[5] ‘다이나모’는 덩커크 철수작전의 작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