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학. [칼럼] 귤화위지(橘化爲枳)의 참 뜻은? 이코노미스트 게재 칼럼(필자가 일부 수정). 2016.9.5.

9월은 탱자가 노랗게 익어가는 때이다. 감귤처럼 생긴 탱자는 향기도 좋지만 먹지는 못한다. 식물학적으로는 둘 다 운향과에 속하니 서로 친척 뻘이지만 하나는 식용으로 쓸모가 많고 다른 하나는 식용으로 적합하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는 이 두 가지 열매를 두고,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었다.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인데 전말은 이렇다.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에 제 나라의 재상인 안영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러자 초나라 왕은 제 나라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와 도적질을 많이 한다고 힐책하였다. 이에 안영이 귤화위지에 비유하면서 제 나라에서 태어나 사는 사람 중에는 도둑이 별로 없는데 이 나라에서 도적질을 많이 한다면 이는 제 나라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초나라의 풍토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반론을 펼쳤다는 것이다.

기후와 토양이 바뀌면 정말로 귤나무에서 탱자가 열릴까? 내가 이 사자성어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그때는 제주도 귤나무를 서울에 옮겨 심어보고 정말로 탱자가 열릴지 알아봐야겠다고 맘먹은 적도 있었다. 말의 참뜻을 몰랐기 때문이다. 귤화위지는 생물학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환경의 차이에 따라 똑같은 사람이라 해도 추구하는 목표와 행동, 선택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현상을 비유한다는 것을 늦게야 알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동식물은 자연환경에 적응적 진화하는데 애를 쓰지만 사람은 자신이 속한 조직과 사회의 제도에 반응하고 이용하려는 속성이 많다. 예컨대 일 잘하는 사람을 제대로 보상하고 해악을 끼친 사람을 제때에 적절하게 제재하며, 귤과 탱자를 혼동하지 않는 조직에서는 누구나 성실하게 일하려는 유인이 있다. 그러나 신상필벌(信賞必罰) 원칙이 흐릿하고, 내가 부린 재주에 다른 사람이 공을 채가는 조직에서는 일보다는 친분 맺기 정치와 비정상적인 잇속을 챙기려는 탱자 족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탱자가 되고 싶지 않은 대다수 구성원들은 냉소주의에 빠지면서 조직의 파망을 재촉할 것이다.

어느 조직, 어느 사회든 탱자 족과 귤 족 중 누가 우대받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제도의 경쟁력에서 비롯된다. 국가의 흥망성쇠도 마찬가지이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영국의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멤버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을 방문, 탐사하고는 ‘한국과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8)’이란 책을 썼다.[1] 이 책에서 비숍은 조선인에 대한 첫 인상이 지저분하고 게으르고 가망 없다고 느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시베리아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만나서 그들이 근면성실하게 일하며 재산을 모으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바꾼다. ‘조선의 농부들은 양반과 관료들의 가혹한 세금과 갈취 등으로 재산이 안전하게 보호되지 않기 때문에 하루 세끼를 겨우 먹을 수 있을 만큼만 경작하고’, 시베리아 정착민들도 ‘그대로 조선에 있었으면 똑같이 근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비숍의 결론이었다.

120년 전 비숍의 관찰은 귤화위지의 영락없는 한반도 사례이다. 생긴 지 2000년이 넘은 고사성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인용하는 까닭은 인간과 사회의 근본에 대한 혜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을 돌아봐도 권력형 비리와 부패는 물론, 영리조직의 경영에서도 이 비슷한 사례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예컨대 잘되는 음식점은 맛만 좋은 게 아니라 누가 주인이고 종업원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다들 열심히 체계적으로 일하는 특징이 있다. 노력과 보상의 연계에 대한 주인과 종업원 사이의 돈독한 신뢰가 남다른 협력과 고객 응대로 표출되고 있음이다. 그러니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가서 탱자나무 울타리에 걸려 있는 노란 열매를 혹시라도 보게 되면 한번쯤 자문해보시라: 우리 회사는 탱자가 잘되는 조직인가, 아니면 귤이 잘되는 조직인가? 우리나라는 어떤가?


[1] 영국의 경제주간지 The Economist는 금년 2월(2016.2.20)에 ‘남한과 이웃 나라들: 초라한 관계(South Korea and its neighbors: The poor relation)’라는 제하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에서는 비숍의 책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국제관계가 120년 전 구한말 상황과 비슷한 점이 있음을 은근하게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